죽음

나의 할머니는 내가 고등학교 2학년 때 돌아가셨다. 주위 어른들은 호상이라며 서로 위로했지만 그게 무슨 의미인지 몰랐던 나는 가장 가까운 사람의 죽음으로 그 동안 경험하지 못한 최고 수준의 혼란으로 내 자신을 밀어 넣었고 그 동안 조용히 지나갔다고 생각했던 사춘기가 오춘기, 육춘기가 되어 다시 찾아왔다. 고등학교 내내 우반(당시 인문계 고등학교에는 우열반 제도가 있었다)이었던 내가 대학교를 포기하자 담임의 근심거리가 하나 더 늘었고 술과 담배를 본격적으로 하면서 어울리는 친구들이 달라졌다.

나의 아버지는 내 아들이 태어나는 날 운명적으로 돌아가셨다. 보통 사람들은 내 아들이 할아버지 돌아가신 날 태어났다고 말하는데 난 아버지 임종을 보느라 아들 태어나는 것을 보지 못했다. 그래서 지금도 아버지가 돌아가신 날 아들이 태어난 것으로 표현한다. 뭐 그게 뭐 중요하겠냐만은. 장례를 치르느라 아들의 탄생을 충분히 축복해 주지 못한 것이 아직도 미안할 따름이다.

나는 이제 넓지는 않지만 집도 있고 굴러가는 자가용이 있고 아들도 둘이나 있고 벌어 놓은 돈은 별로 없어도 빚지지는 않고 살고 있다.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다. 그저 남은 이들에게 최대한 불편하지 않은 죽음을 선택하고 싶을 뿐이다. 태어난 건 내 의지가 아니었지만 죽음은 내 의지로 죽고 싶다. 혹시라도 내가 질병이나 사고로 연명을 해야 하는 상황이라면 과감히 연명치료를 포기하고 싶다.

죽음 1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소설 '죽음'에는 죽음 이후의 이야기가 나온다. 물론 소설이지만 전작 '개미'처럼 베르베르답게 정말 그럴싸하게 썼다. 죽은 영혼과 이승의 산 사람들과 계속하여 소통을 도와주는 영매 이야기부터 산 자와 죽은자의 대화를 도와주는 기계 등 죽음과 관련된 아주 많은 개념이 등장한다. 일단, 초반부터 주인공이 죽는다.

"나는 왜 죽었을까"라는 질문으로 시작하여 "나는 왜 태어났을까"로 귀결되는 소설은, 그 속편을 암시하는 것인지도 몰라도, 죽음을 걱정할 시간에 길지 않은 인생 더 값지게 살 수 없는지 주위를 둘러보게 한다.

그리고

2020년 코로나19가 전세계적으로 창궐(팬더믹)하는 것을 예견하기라도 한 듯 소설 한 구절에 이런 대화를 집어 넣었다.

지구상에 인간이 너무 많으면 하는 수 없이 <상쇄>를 해야 하네. 세계 대전과 전염병, 지진이 일어나야 한다는 뜻이야. 그래야 지나치게 높아진 인간 군집의 밀도를 낮춰 듬성듬성하게 만들어 놓을 수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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